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8월 종파사건 (문단 편집) == 결과 == 8월 전원회의의 조치는 즉시 중국과 소련에 알려졌다. 중국에 망명한 서휘와 윤공흠, 그리고 당시 주소 북한대사인 [[리상조]] 등은 중국과 소련에게 북한에 개입하여 이러한 결과들을 수정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중국과 소련도 이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여 아나스타스 미코얀[* [[미그|미코얀 구레비치]] 설계국의 창립자인 아르티옴 미코얀의 형이다.]과 [[펑더화이]]를 단장으로 하는 어마어마한 연합 대표단을 파견, 김일성에게 8월 전원회의의 조치를 철회하고 관련자들을 다시 복권시켜줄 것을 요구하였다. 미코얀은 소련의 총정치국 부서기장으로 [[러시아 혁명]]을 눈으로 본 사람이기도 했으며, [[헝가리]] 등 동유럽의 민주화 바람을 잠재우고 마오쩌둥 단일 주석 체제를 집단 지도 체제로 바꿀 겸 중국에 왔다가 겸사겸사 방문한 것이었다. 중국 측의 펑더화이는 [[6.25 전쟁]]의 조중연합군 총사령관이자 마오의 오른팔이었으나 '''김일성과 사이가 무척 안 좋았다.''' 이런 거물들이 파견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당시 소련과 중국이 얼마나 진지했는지는 자명하다. 사실 여기에는 웃지 못할 이야기가 하나 있다. 중국과 소련이 회담을 하는데, 독재 체제를 계속 유지하는 중국을 못마땅하게 여긴 소련이 [[흐루쇼프]]의 스탈린 비판과 관련, 독재 체제는 무너져야 하며, 집단 체제로 바뀌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중소회담 내내 언급했다. 사실 중국 입장에서도 체제의 근간을 흔드는 말들이었기에 맨 처음 어느 정도는 말을 맞받아쳤다. 하지만 소련의 회담 상대 미코얀은 위에도 상술하였다시피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이었고, '''결과적으로 전혀 게임이 안되었다.''' 덕택에 소련에 의해서 독재 체제에서 집단 체제로 바뀐 전례가 있던 중국은 이날 또 털렸다. 그렇다고 중국 입장에서는 소련을 어떻게 할 수도 없었으니 화가 머리 끝까지 날 만했다. 그런데, 그 회담 바로 뒤에 연달아서 중국과 북한이 면담을 했다. 잔뜩 화난 중국은 다음날 비행기로 북한으로 미코얀과 같이 방문하겠다고 선언했고, 상기한 상황에 이르게 된다. 김일성은 미코얀과 펑더화이가 참석한 [[조선로동당 1956년 9월 전원회의]]에서 자신에게 과오가 있음을 인정하기보다는 최창익과 박창옥의 죄를 입증하고 자신이 취한 조치가 정당했음을 보여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전술핵으로 무장한 주한미군과 한국전쟁으로 대폭 증강된 [[대한민국 국군|한국군]]이 건재한 상황에서 김일성은 동맹국들의 요구를 거절할 상황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방문단의 포스가 너무 강력했다.''' 결국 김일성은 굴복, 최창익의 출당 조치를 철회하는 굴욕을 겪고 자중하는 모양새를 펼친다. 하지만, 실질적인 복권 절차는 차일피일 미루면서 시간을 끌었다. 윤공흠과 서휘 등 중국으로 망명한 김일성 반대파들 또한 김일성의 박해가 두려워 귀국하는 것을 거부하였으며 그들은 이후에도 계속 중국에 머물렀다. 이런 상황이다보니 김일성은 도리어 소련과 중국을 등에 업고 자신에게 반대하던 반대파들을 회유하는 한편 반대파의 완전한 제거를 위하여 '반종파투쟁'을 강도 높게 추진하였고 이 과정에서 [[김두봉]], 오기섭, 류축운 등이 현직에서 해임되는 등 1957년 여름까지 200여 명의 반대파 인사들이 '종파주의자'로 체포되었다. 그리고 종파주의자들에 대한 책임을 물어 김두봉을 국가수반의 자리에서 내쫓아 실각시킨다. 이후 1958년, [[중소결렬|소련과 중국이 공산권의 헤게모니를 놓고 충돌하면서]] 김일성의 단일 체제 수립은 더욱 심화되었다. 소련과 중국 모두 동맹국들의 지지를 얻어내는 데 여념이 없었고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 사이에서 줄타기 협상을 벌이며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원시적 형태의 [[주체사상]]이 처음 등장한다. 중국과 소련 외세의 영향력을 거부하고 어디까지나 우리의 관점으로 주체적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강대국에 흔들리지 않는 외교 자체는 옳은 것이다. 하지만 이걸 사회의 모든 분야에 확대시키면서 정교하고 이상한 방향으로 사상을 짜맞추기 시작해서 결국 1970년대에 가면 김일성 개인 숭배와 세습을 정당화하면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완전히 대체한다. 90년대에서 2000년대에 들어 북한은 공산주의 국가임을 표방하면서도 마르크스의 서적은 금서로 지정했고 [[김정은]] 정권이 들어선 지금은 아예 공산주의도 부정하고 있다. 결국 김일성은 중국과 접촉해 지지를 약속하는 대신 북한에 주둔 중이던 중공군을 [[중국 인민지원군 철수|철수]]시키고 펑더화이의 내정간섭에 대한 '''사과'''를 받아내는 엄청난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이로써 김일성 반대파를 지킬 방패막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미코얀과 펑더화이의 개입으로 목숨을 부지했던 최창익과 박창옥은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숙청당했고 기타 김일성 반대파들 역시 비슷한 말로를 맞이했다. 이러한 숙청은 1960년까지 이어졌고 김일성의 숙청을 피하여 소련이나 중국으로 도망친 사람만 수만여 명에 달했다. 즉, 중국과 소련은 김일성을 막기 위하여 내정간섭까지 불사했지만 김일성은 이를 견뎌내고 자신의 위치를 굳건히 지켰다. 오히려 김일성은 더 많은 반대파들을 숙청, 제거하여 자신의 위치를 공고화하고 [[주체사상]]을 결합시켜 자신을 완벽하게 신격화하는 데 성공한다. 여기에 세습을 정당화하며 공산주의, 사회주의가 아닌 [[봉건주의]] 사상으로 전락한다. 심지어 [[스탈린주의]]조차도 세습에 정당화하는 것에 대해 봉건주의라며 비판을 한다. 권력을 세습하는 것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조차도 실현하지 못한 전근대 봉건왕조 사회에서나 하는 것인데, 북한은 그걸 하고 있으니 부르주아 민주주의에도 도달하지 못한 낙후되고 후진적인 사회인 것이다. 지금까지도 북한과 중국은 겉으로는 우애를 과시하지만 속으로는 불신과 대립이 여전하다. 당시 철군문제와 연안파 숙청으로 관계가 더 냉랭해졌고, 김일성은 "수십만의 군대가 우리 땅에 머무르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러자 소련은 "중국지원군이 조선에 계속 주둔하는 것이 조선 인민과 모든 사회주의 진영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면서 주둔을 지지하였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1954년 중국군 7개 사단이 철수했고, 55년 3월에 6개 사단이 추가로 떠났으며 1956년 4월 북-중 관계가 심각해졌을 때도 44만의 지원군이 북한에 주둔하고 있었다. 완전히 철수하기까지는 2년이 더 걸렸다. [[http://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661454.html|당시 기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